퇴직!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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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기 전, 늦어도 3년 전부터는 준비를 하라고 주변에 권유한다. 그들 중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얘길 들으면 속으로 따라 읊조리게 된다. ‘어떻게든 된다고?’ 의문문으로 끝나지 않고 뒤엔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붙는다.
‘그래.. 어떻게든 되지. 그대가 생각하는 상태가 아닌 게 문제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낙관주의는 마냥 좋은 것인 양.
약이 되는 낙관이 있고 독이 되는 낙관이 있다는 걸 잊고 아무렇게나 섞어서 편하게 생각해버린다.
막연한 낙관은 치명적일 수 있다.
스톡데일이라는 미 공군 장교의 일화 들어보셨을 거다.
그는 월남전에서 포로가 되어 모진 고문과 굶주림을 겪으며 8년을 버텨내고 생환했다. 기자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어떻게 견딜 수 있었냐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곧 풀려날 거라고 섣불리 낙관만 하는 포로들은 금세 좌절해서 죽었다.
하지만 나는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장기간 버텨야 한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덕분에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다"
섣부른 낙관, 막연한 낙관은 이처럼 치명적인 독이 된다.
그의 얘기는 내 머릿속에 이런 이미지를 만들었다. 하루하루를 단단하게 다진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 (장장 8년!) 견고하고 거대한 요새가 된다.
살아있음의 에너지로 충만한 요새,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요새가 축성되어 폐허 위에 우뚝 선다.
희망은 생기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단단하게 만들어 지녀야 한다.
막연한 낙관은 막연한 희망과 한 세트다.
상황에 의해 생겨난 희망은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어느 날 신기루처럼 스러진다.
쨍! 하고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매서운 겨울날 히터 따뜻이 켜진 차를 몰면서 루이 암스트롱이 느긋이 부르는 ‘What a wonderful world’를 듣는 일은 행복감에 젖게 한다.
그럴 때 세상은 노래 가사처럼 참 멋지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나 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환상은 사라진다.
그렇다, 나는 살면서 그런 체험을 여러 번 했다. 방송사 문을 열고 나가서 다른 회사로 문을 열고 들어갈 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러 회사의 문을 열고 나와 다음 문이 열리기까지 오랜 시간 바깥을 헤매야 했을 때 비로소 알았다. 뼛속까지 시리게 하는 바깥세상의 냉기를.
퇴직,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다.
봄 혹은 가을일 때 나오면 그나마 낫겠다. 하지만 어차피 곧 겨울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게 그거다.
바깥은 ‘어떻게 되겠지’의 세상이 아니다, 계급장 떼냈으니 오직 맨몸으로 붙어야 한다.
바깥으로 튕겨나가는 걸 막아주는 로프도 없다. 링 없는 링에서 벌이는 난투장이다.
그런데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준비 없이 밖으로 뛰쳐나온 이들이 겪는 수난에 대해서는 조금만 귀를 열면 여기저기서 쏟아내는 비명 섞인 이야기를 무시로 들을 수 있다.
혹 내 얘기가 궁금하신 분은 ‘자리잡자’ 유튜브의 13번째 편 ‘어느 PD의 인생 고백’을 보시라. 그 실상을 쬐끔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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